짧은 답. 카사 밀라는 안토니 가우디가 페레 밀라와 그의 아내 로세르 세기몬을 위해 설계했어요. 설계도는 1906년에 시에 제출됐고, 공사는 1912년에 끝났으며, 건물은 곧 돌 물결로 유명해졌어요. 1984년부터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올라 있어요.
밀라 부부는 누구인가요?
페레 밀라와 로세르 세기몬은 이 건물을 의뢰한 부부예요. 1905년에 로세르가 그라시아 거리의 땅을 샀어요. 부부는 가우디에게 공동주택 설계를 부탁했어요. 주 층은 자기들 집으로 쓰고, 나머지 집은 세입자에게 내주는 계획이었어요.
가우디는 어떻게 설계했나요?
1906년 2월 2일 설계도가 시에 보내졌고, 공사가 시작됐어요. 외벽은 돌 물결이고, 뒤쪽 구조에 매달려 있어서 하중을 지지하지 않아요. 가우디는 여러 협력자와 함께 일했어요. 첫 번째 철제 난간은 바디아 형제의 공방에서 나왔고, 화가 알레익스 클라페스가 벽화 작업을 감독했어요.
이 건물은 거리의 다른 건물과 전혀 달랐어요. 안에서는 중정 두 개가 빛을 들이고, 다락은 벽돌 아치가 받치고, 옥상에는 조각 같은 굴뚝이 서 있어요.
시는 왜 가우디와 다퉜나요?
건물이 규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1907년 12월에는 기둥 하나가 인도로 튀어나왔다는 이유로 공사가 중단됐어요. 시는 건물이 너무 높고 너무 크다고도 주장했어요. 결국 1909년 12월 28일, 에이샴플레 지구의 위원회가 카사 밀라는 기념비적인 건물이라서 일반 건축 규정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결정했어요.
사람들의 평가는 갈렸어요. 돌 물결을 사랑한 사람도 있었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오래 남은 별명을 붙였어요. 바로 ‘라 페드레라’, 채석장이에요.
옥상의 조각상은 어떻게 됐나요?
건물 꼭대기에는 묵주의 성모 청동상을 올릴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1909년 ‘비극의 주간’ 폭동이 일어났고, 밀라 부부는 조각상을 포기하겠다고 요청해서 조각상은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묵주 기도의 몇 마디는 지금도 처마 장식에 남아 있어요.
언제 완공됐나요?
1912년 10월 31일, 가우디가 공사 완료를 증명하는 서류에 서명했어요. 가우디는 1926년 전차에 치여 73세로 세상을 떠났어요.
1912년 이후에는 어떻게 됐나요?
밀라 부부는 주 층에 살았고, 나중에 로세르는 천장 여러 곳을 뜯어내고 실내를 다시 꾸미게 했어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자 건물은 몰수되어 공화국 정부의 사무실로 쓰였어요. 페레 밀라는 1940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1946년에 건물은 부동산 회사에 팔렸고, 1953년에는 다락이 집으로 나뉘었어요. 로세르 세기몬은 1964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1971년에는 2층에서 큰 돌이 떨어져 수리가 이어졌고, 1976년 12월부터는 차고 일부에 가게 약 50곳이 들어선 벼룩시장이 열렸어요.
어떻게 박물관이 되었나요?
천천히 됐어요. 건물은 단계적으로 보호를 받았어요. 1969년에는 국가 기념물이 되었고, 1984년 11월 2일에는 구엘 공원, 구엘 저택과 함께 유네스코 목록에 올랐어요. 2005년에는 목록의 가우디 작품이 일곱 점으로 늘었어요.
1986년 12월 카탈루냐 은행(Caixa Catalunya)이 건물을 사들여 복원을 시작했어요. 1992년에 주 층이 전시장으로 문을 열었고, 1996년 6월에 복원이 끝나면서 문화 센터로 개관했어요. 2013년에는 라 페드레라 카탈루냐 재단이 소유주가 됐어요. 돌과 철을 돌보는 작업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활용하나요?
관람할 때 가져가세요. 외벽이 하중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다락이 공동 세탁장이었다는 걸 알면 더 뭉클해요. 코스를 짜려면 카사 밀라 볼거리를 읽고, 운영 시간과 가는 방법을 확인한 뒤, 입장권 페이지에서 관람 방법을 고르세요. 한 시간밖에 없다면 중정과 옥상을 보세요. 오전 시간이 있다면 다락과 집도 더하세요.